Dadudabi: A Manifesto for the Expanded Human
오영종 · 50BELL | as a dadudab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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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인간과 기술
인간은 도구를 통해 자신의 정신과 신체를 확장해 왔다. AI와 기술은 이 관계를 재편하며, 인간의 가능성을 끝없이 넓히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능력이 전례 없는 속도로 확장되는 동시에, 인간의 선택이 놀라울 정도로 쉽게 예측되는 시대에 서 있다.
인간은 자신의 시간적 한계를 넘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만들 필요는 줄어들고, 당위는 약해지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 예측 가능한 존재가 되어 평균이라는 흐름에 순응할 때, 선택하는 인간은 점점 희미해진다.
누군가 인간을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과는 다르지 않다. 최적화된 시스템은 더 효율적인 선택을 반복하게 만들고, 예측 가능한 취향과 행동을 증폭하며, 인간을 평균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더 많은 사람이 같은 것을 원하고, 같은 것을 만들고, 같은 것을 소비할수록 예측 가능성은 커지고 평균은 더욱 공고해진다. 서로 다른 선택이 존재할 여지는 그만큼 줄어든다.
최적화는 선택지를 늘리면서도 선택의 방향을 평면화할 수 있다.
그 순간 인간은 입체적인 선택의 가능성마저 잃게 된다.
이 시대, 인간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성가신 잡음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거대한 가능성이자 가장 조용한 위기다.

II. 다두다비: 확장과 선택
다두(多頭)는 외부 지능과의 연결을 통해 사유의 시간과 범위의 한계를 밀어 확장하는 지성이다.
또한 여러 관점을 동시에 견지하며, 검증하고, 직조하고, 충돌시키는 정신이다.
다비(多臂)는 인간의 몸에 축적되어야 했을 생산능력이 기술과 기계를 통해 육체의 외부까지 확장된 신체다. 이 확장된 신체는 동시다발적으로 행동하며, 인간의 감각과 판단, 기술과 물질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다두다비는 외부 지능과 기술을 통해 인간의 사유와 생산을 확장하는 정신이다.
다두다비는 확장된 능력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어디로 향하게 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AI가 제시한 것을 따를 수도, 거부할 수도, 그대로 확정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는가만이 아니라,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선택의 방향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이다.
인간이 가장 우월하기 때문에 인간의 판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만들며, 무엇을 경험할 것인지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선택하며, 그 선택에 책임지는 존재. 우리는 이들을 다두다비적 인간,
다두다비안(Dadudabian)이라 명명한다.

III. 사유와 생산
기술은 언제나 인간의 제작 장벽을 낮춰 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한 기술은 인간이 적응하고 숙련할 시간 자체를 소거하며 진화한다. 사유와 언어, 판단과 창작의 방식이 동시다발적으로 개편되는 시대에, 변화의 속도는 인간의 적응을 압도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이 시대에, 도구를 다루는 기술이나 단순한 제작 능력의 함양만으로는 차이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아이디어를 현실로 옮기는 비용마저 빠르게 낮아지는 지금,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기계의 속도를 뒤쫓는 낡은 적응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대체 불가능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유가 생산력을 획득해야 한다.
이제 인간은 생각하는 일과 만드는 일 사이의 거리를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야 한다.
사유는 생산을 지시하고, 생산은 다시 사유를 변화시킨다.
생각하고, 지시하고, 생성된 것을 판단하고, 수정하고, 제작하고, 되풀이한다.
다두다비안은 기술의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다. 동시에 기술에 의해 생산되는 인간도 아니다. 외부 지능과 확장된 생산력을 자신의 사유와 판단 속에 조직하고, 그것을 현실에 행사하는 주체다.

IV. 선택과 저항
알고리즘은 인간의 취향과 행동을 예측하고, 예측한 선택을 다시 인간에게 들이민다. 반복되는 선택은 예측을 강화하고, 강화된 예측은 다시 선택을 규정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예측된 선택의 방향을 따라가게 될 수 있다.
의심하고 확정하는 일은 인간이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때로 기꺼이 비효율을 선택하고, 우연의 개입을 허용하며, 예측을 따르거나 배반한다. 그러나 예측을 배반하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선택의 방향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최적화는 차이를 줄이고 평균을 공고하게 만든다.
차이, 즉 다양성이야말로 선택의 방향이 하나로 수렴하지 않도록 가능성을 열어두는 힘이다.
다두다비의 저항은 기술을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이 만들어낸 가능성을 딛고, 외부 지능과 인간, 기계와 물질 사이의 관계를 스스로 구성하며 또 다른 가능성을 빚어내는 일이다.
의지하지만 복종하지 않는다. 의심하지만 거부하기 위해 의심하지 않는다. 확장하지만 방향은 스스로 결정한다.

V. 분투하는 인간
다두다비안은 완성된 인간도, 인간을 초월한 인간도 아니다.
스스로 자기 존재의 방식을 만들고, 그 방식마저 다시 의심하며 자신을 확장하는 과정적 인간이다.
그는 자신을 깨뜨릴 가능성까지 자신 안에 품는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가능성 위에 다시 자신을 기꺼이 던질 수 있어야 한다.

VI. 미래
기술은 예측 가능한 세계를 끝없이 넓혀갈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식하고,
때로는 그 방향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확장과 저항, 예측과 배반, 사유와 생산, 인간과 외부 지능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발생한다.
다두다비안은 기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스스로 엮고 결정하는 자다.
이제, 확장과 저항은 영원히 멈추지 않는 원을 그린다.
이 글의 저자는 누구인가?
이 선언서는 한 사람의 사유인가,
AI의 생산물인가,
아니면 둘의 협업으로 쓰였는가.
이 글의 개념과 질문은 인간이 설계했다.
AI에게 그것을 확장하고, 의심하도록 요구했다.
그 결과를 다시 수용하거나 거부하고, 수정하고, 선택했다.
그리고 이 수행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렇다면 이 글의 저자는 누구인가?
인간이 자신의 사유와 생산의 일부를
외부의 지능에 위임하고,
그 결과를 다시 자신의 판단 안에서 조직한다면,
저자는 여전히 한 사람일 수 있는가.
이 글의 저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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